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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전시
The Last Exhibition
2024.08.20 - on going
2024.08.20 - on going
김창재, 안민혜, 임다울, 정세영

 

2023년 6월, 우리는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로쿠스 솔루스에 모였다. 책은 ‘시스템아트 System Art’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키워드 아래에 미술에서 다뤄지는 거의 모든 주제를 느슨하게 에둘러 묶은 책이었다. 한 권을 6개월 넘게 읽었으니 아주 열심히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각자 다른 관심사가 모두 포함된 그 책을 즐겁게 읽으며 서로의 생각과 질문을 공유했다. 그중 유일한 기획자인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의 전시 형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였다. 꽤 오래전부터 직간접적으로 기후위기를 주제로 삼은 전시들이 많이 열리고 있었고, 많은 미술 기관이 수년 전부터 기후 위기를 위해 할 수 있는 기관의 실질적인 활동을 연구하고 자료를 출간하며 나름의 실천을 해나가고 있다. 그 연구들은 대부분 탄소 배출량을 조사하고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기관들은 실제로 재활용 가벽을 활용하거나, 작품의 설치에 들어가는 재료를 줄이는 방법들을 실천한다.

 

하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그러한 소극적인 대책은 기후 위기의 속도를 줄일 수 없다고 염려한다. 그 들에 의하면 기후 위기를 제대로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존 시스템의 대대적인 변화 추구, 즉 ‘탈성장’이다. 그들은 현재의 시스템을 고수한 채로는 그 어떤 기후 위기를 위한 노력도 성공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없으며, 끝없는 성장과 확장을 독려하는 소비 만능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팬데믹을 통해 사회가 잠시동안 멈추거나 느리게 운영되는 경험을 했고, 그 시기 동안 탄소배출이 눈에 띄게 감소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주장일 듯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COVID-19의 종식과 함께 기후 위기는 이전보다 더 빠른 추세로 심각해지고 있고, 우리는 시스템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희망인지 깨달으며,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평범한 삶에까지 찾아온 변화를 매일 경험하고 있다.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하며 계속 전시를 생산해도 괜찮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전체 시스템을 바꾸자는 주장에 동의할 수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이 아니라, 그 결과가 정말 긍정적일지 확신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버린 지금의 시스템을 어떻게, 누가, 함부로 바꿀 수 있겠는가. 그에 따른 여파가 어디까지 영향을 줄지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편리하게 매일 사용하던 플라스틱 컵이 기후 위기를 가져왔다는 말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시스템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나는 그 대신 내가 만드는 전시 시스템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지 실험해 보고 싶었고, 세 명의 작가는 그것을 지지하며 유용한 의견들을 덧붙여 주었다. 그것이 <최후의 전시>의 시작이 되었다.

 

우리는 전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즉 공간, 작품, 설치, 운송 등의 것들과 전시에서 각각 맡고 있는 역할을 모두 다시 생각해 보고자 했다. 각각의 요소들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보았고, 그렇게 요소들을 하나씩 바꾸었을 때 어떤 결괏값을 가질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공간을 최소화하고, 작품을 실제로 제작하지는 않은 채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만을 이야기하면서 작품의 형식과 태도를 연상시킬 수 있는 제스처로서의 오브제를 제작해 모빌에 달았다. 우리는 기획자와 작가의 역할을 고정하지 않고, 여러 역할을 공유하며 함께 모빌을 제작했는데, 예컨대 전시 전체에 대한 아이디어를 서로 의논하였고, 작가들이가진 또 다른 질문들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의 주제를 고수하되, 작품의 형식이나 오브제의 제작과 관련된 것은 상황에 맞춰 함께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지지대에 세 개의 제스쳐와 세 개의 글이 달린 모빌을 제작했고, 모리스 블랑쇼의 책 제목 『최후의 인간』에 농담을 조금 섞어 <최후의 전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최후의 전시>를 제작하고 설치하는 것에는 넓은 장소와 운송, 설치, 엄청난 양의 재료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고 싶은 작품이 무엇인지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음성 파일이나 드로잉으로 주고받기도 하고, 며칠 동안 연이어 만나 한참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것들을 보고 들으며,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마치 내가 실제로 본 듯이 상상하고 묘사하여 글로 적었다. 그 글과 작가들이 모빌에 달아놓은 작은 오브제들을 연결한다면 <최후의 전시>를 관람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 작품을 실제로 본 듯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엄청난 물질과 공간,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도 실제로 만든 것과 유사한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을 일이겠지만, 이런 질문을 건네는 ‘제스쳐’를 보이는 것은 중요했다.

 

우리는 관람의 형식도 바꿔보고자 했다. 멸균된 화이트 공간 대신 관람객의 사적인 생활 공간에서 전시를 보여주고, 여러 관람객이 그것을 보기 위해 이동하는 대신, 단 한 명의 관객에게 전시를 전달하고 그 관객이 자신의 공간에 설치하여 오랫동안 전시를 관람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1~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관람객이 그다음 관람객에게 전시를 전달하여 다시 자신의 공간에 설치하여 관람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전시. <최후의 전시>는 고정되지 않은 최소한의 공간을 점유하며 그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전시가 관람객에게 주는 어떤 효과가 공간, 물질, 시간이 어우러진 어떤 값이라고 가정한다면, 공간을 줄이고 시간을 늘리며, 물질을 줄이고 이야기를 늘리는 방식으로 그 값을 상쇄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을 사랑하며,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거대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가진 또 다른 질문은 인간 존재, 인간의 지식, 인간의 시스템의 나약함과 불안정함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늘 헤매었고 기획자와 예술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것에 관하여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없었고, 어떤 결정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금쪽이들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없었으며, 저출산의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일기예보는 늘 틀렸고, 감당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소식들이 미디어를 도배했으며,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말과 이미지들이 넘쳐났다. 개인의 상태도 마찬가지다. 내뱉은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관계는 늘 불안했으며,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했다. 우리와 우리 주변에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는커녕, 개인의 불안조차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전시나 작품을 통해 확신에 찬 무언가를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들기에,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뭔가를 해야만 하는 상태와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안에서 진동하며,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모빌을 만든다. 이 모빌-전시는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마지막 질문은 ‘직접 본 것’과 ‘상상한 것’의 차이, 또는 전시 관람이 발생시키는 효과의 어떤 ‘값’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가 어떤 예술 작품 또는 전시를 보고 그것이 감동이든 감흥이든, 단순한 자극이든 간에 그것은 어떤 종합으로 다가오는 것일 텐데, 그 종합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공간’, ‘시간’, ‘물질’, ‘형태’, 그리고 ‘네러티브’였다. 이것들의 종합, 그리고 그 종합과 관객의 마주침 안에서 발생하는 무엇이 예술의 효과라면 그것들의 비율을 조금씩 달리하며 총량을 맞춰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의 점유를 줄이고 시간의 점유를 늘리면? 물질의 사용을 줄이되 형태는 유지하고, 네러티브의 접촉면을 넓히면? 엄청난 공간과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도 비슷한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는 작품과 전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다소 무모하고 유치한 질문인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질문을 붙들고 늘어지는 게 미술의 묘미이기도 하니, 한 번 만들어 보고, 어떻게 되는지 목격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예술의 영향을 측정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의 측정은 불가능하거나 거짓 결괏값을 가지기 쉬울 테니 말이다. 그보다는 그것을 제작한 후 쓸데없는 논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 논쟁 후, 아무런 합의도 이뤄내지 못한 채 모두 각자의 결론에 도달하여, 그것으로부터 다시 무언가가 시작되길 바랐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금세 다시 빙글빙글 돌며 어디에도 닿지 못하겠지만, 그것이 미술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다. 의심을 다시 의심하는 확신 없는 말, 답 없는 무용한 질문,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모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

 

이제 작가들의 작품을 간단히 살펴 보자. 우리는 당신에게 가상의 전시 관람 코스를 제안한다. 가상이라 하면, 당신은 웹상의 어떤 공간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없다. 이것은 오로지 당신의 상상력에 의존한, 당신의 머릿속에서 펼쳐질 가상의 공간이다. 우리는 6호선 효창공원역 앞에서 만나 김창재의 공공 설치 작품을 감상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임다울의 전시 공간으로 이동한다. 거기에서 임다울의 작품을 둘러본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정세영의 공연이 열리는 대형 양곡창고로 갈 것이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부터 영상과 함께 정세영의 작품이 시작된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어떤 생김새를 가졌는지는 모빌에 함께 걸린 작품 묘사 글을 참고해 주길 바란다. 대신 이 지면에서는 작가들의 태도와 관심사에 관해 에둘러 설명할 것이다. 지나치게 자세한 작품에 대한 설명은 당신의 언어를 빼앗는 일이 될 수 있기에 되도록 지양하고자 한다.

 

당신이 보는 모빌의 가장 위층을 차지하고 있는 오브제는 김창재 작가의 <방향계>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작가는 평범한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정치성, 정치력에 관해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곳과 그 주변에 관심을 두고 그곳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는 개인들의 욕망을 작품의 에너지로 이용한다. 하지만 그는 반역적인 활동가가 아니다. 그는 시스템을 거스르는 대신 현재 시스템의 틈을 이용한 윈-윈 전략을 사용한다. 그의 작품 <방향계>는 효창공원역 일대에 길게 이어지는 전망대를 설치하고, 그것을 경의선 숲길과 이어서 볼 수 있도록 연결한 것이다. 한 층만 높이 올라가 우리가 사는 곳을 바라본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는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도 있다.

 

전시 관람의 두 번째 코스인 임다울 작가의 제스쳐는 모빌의 가장 마지막 층에 있다. 작가의 본래 작품을 축소한 듯한, 또는 그것을 장난감처럼 재구성한 듯한 연약해 보이는 작은 작품이 모빌의중앙에 거꾸로 매달려 그 아래 주렁주렁 달린 여러 이미지를 지탱하고 있다. 작가는 정체성의 빈약함, 또는 실체 없음에 관심을 둔다. 누군가는 그 정체성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기도 하지만, 그가 보기에 정체성은 매우 유동적이다. 어쩌면 패션 같은 것이고, 잠시 고인 끈적한 액체 같은 것이며, 그러면서도 온전한 본인의 선택만으로 갖게 된 것도 아닌 기이한 이미지다. 작가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 – 정체성을 미술 매체에 빗대어 낭만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전시의 마지막 코스는 러닝 타임이 2시간이 넘는, 정세영 작가의 아주 긴 연극이다. 연극에 시간의 순서가 빠질 수 없는 만큼, 작가는 모빌에 연극이 진행되는 순서를 떠올릴 수 있는 네 개의 네러티브 이미지를 연결했다. 정세영 작가에게 ‘사건’은 느닷없이 등장한다. 실체를 가늠할 수도 기원을 찾아볼 수도 없는 이러한 사건은 인간에게 사고와 행동을 유발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종교, 문화, 신념, 가치가 되어 특정 그룹의 인간상을 형성하며 우리 삶에 스며든다. 작가는 극장에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알 수 없는 물체”가 가져오는 혼란에 각자 다르게반응하는 여러 인간 군상을 상상하고, 그 마지막 순간을 다소 엉뚱하고 유머러스하게 연출한다. 작품의 큰 흐름뿐만 아니라, 디테일한 연출에서 나타나는 리얼하고 황당한 사건들은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2시간 반 동안 계속 등장한다.

 

당신이 모빌을 보는 동안 이들의 작품이 무엇인지를 바로 유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모빌에 함께 달린 텍스트를 읽으며, 당신의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야 한다. (해당 텍스트들은 구글 드라이브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도 있다 – 우리는 모빌의 텍스트가 읽기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상상의 경험이 직접 마주하는 전시 관람 경험과 무엇이 다를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매우 사적인 경험일 테니. 그래도 우리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작품과 당신의 감각에 의존하는 작품은 당신에게 어떻게 다른가? 숨을 멎게하는 부피감과 물성, 눈을 매혹하는 형태와 색감, 진공상태인 듯 낯설게 다가오는 공간의 감촉이 예술의 가치인가? 아니면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 나와 세계의 복잡한 관계를 파고들게 하는 것이 예술의 가치인가? 기후 위기 시대, 어쩌면 그보다 더 혼란한 명칭이 필요한 시대, 전시는 그 시대를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의 말은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가? 그 답이 무엇이든,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보았든, <최후의 전시>가 당신의 머리와 가슴에서 진동을 일으키는 전시가 되길 바라본다.

 

글. 안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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