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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상상의 독자
First Imaginary Reader
2025.04.10
2025.04.10

 

안녕하세요. 영희씨, 고등어 작가님,

 

(오타 조심!)

 

지루하게 오고 가던 피드백을 통과해 드디어 교부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사이 저는 김혜순 시인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의 <쥐> 부분을 읽었습니다.

 

‘나는 왜 나가 아니고, 우리인가, 은유들 속에는 무엇이 감추어져있는가.’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그녀의 긴 산문은 내 안의 시인의 죽음을 아들의 죽음으로 은유하였던게 아닐까.
그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며 분노하며 피를 흘리며 쥐로 환생시켰다는 그 쥐는 먹고 갉을때 외에는 끊임없이 성교하여 무한 증식하고 폐허가 된 타향살이 도시의 지하에서 피폐한 상인들 사이에서 질척거리는 오물과 혐오 속에서 죽고도 살아나 세상을, 사막을, 먼지 자욱한 시장 골목을 파고들어 요리조리 피해 언제쯤 죽을 수 있을까 하지만, 끊임없는 환생으로 번식합니다. 모든 곳을 통과하는 무한한 존재. 나는 수레바퀴가 되어 무수한 존재들과 연결합니다. 이를 그녀는 ‘쥐하기’라고 칭하는 것 같습니다. 이 ‘쥐하기’는 아마도 ‘시(poem)하기’와 같은 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자연스럽다고 모두 스스로가 그러하다고 그녀의 모든 곳, 그 ‘곳’, 그 장소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며, <쥐> 앞에 놓인 <눈의 여자>를 비행기에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는 수백, 수천의 찍찍거리는, 이빨을 갈아야하는, 자그마한 짐승으로 감수분열 하여 돌아왔다. 죽은 뼈들이여 생기를 받고 일어나라 하였더니 사람이 일어나지 않고 쥐 떼가 덮치듯 일어났으니 죽음의 신은 얼마나 놀랐을까. 죽음이 죽음을 물리친 것일까. 아들은 죽음을 통과해 ‘모든 쥐’가 되었다.” <쥐>, p. 80

 

” 나는 내 안에 무한 증식, 무한 사망하는 숯처럼 까만 쥐들을 거느리고 피리를 불며 식별 불가능한 지대를 떠난다. 나는 이곳을 겪었는가? 다만 나의 그 무수한 쥐들 중 한 마리를 이곳에서 만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까만 숯처럼 쌓인 쥐들 중 어느 하나가 지금 붉은 눈 두 개를 반짝 뜨고 있다. 나다. 곧 재가 될 바알간 숯이다.” <쥐>, p. 138

 

이와 동시에 끔찍한 장면이 하나 떠올랐는데요.

 

오션 브엉의 소설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에서 백인 군인들이 군화를 신고 자신들의 자손 번식(아마도 작가의 엄마와 같은 베트남 처녀들과)을 위해 베트남의 한 식당에서 테이블 위로 산채로 열려 있는 살아있는 원숭이의 뇌를 파먹는 장면인데, 왜 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보니, 강영희 씨가 제게 보내주시면 한 문단, 로즈 (Rose)와 일어나다 (Rise) 부분, 오션 브엉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처음 보내주셨을때 아…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는데 들어봤는데 했었거든요. 아닌가요?

 

“난 어디에 있지?” 엄마가 물으세요. “여기는 어디니?” 달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저는 엄마의 이름을 말해요.”로즈”라고요. 꽃, 그 색깔, 색조. 저는 “홍”이라고 한 번 더 반복해요. 우리가 꽃을 보는 것은 그것이 생의 마지막을 향하고 있을 때, 갓 피어서 이미 갈색 종이로 변하고 있을 때뿐이에요. 아마 그렇게 모든 이름들은 환영일 거예요. 얼마나 자주, 우린 무언가의 가장 짧은 순간의 형상을 보며 이름을 붙일까요? 장미 덤불, 비, 나비, 늑대거북, 총살형 집행대, 어린 시절, 죽음, 모국어, 저, 엄마. 그 단어를 제 입 밖에 내고서야 저는 그 ‘로즈(rose)’가 ‘일어나다(rise)의 과거형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아요. 제가 엄마의 이름을 부를 때, 저는 엄마에게 일어나시라고도 말하는 셈이죠. 저는 그 이름이 마치 엄마의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인 듯이 말해요. 마치 이름이란 게 그 안에서 우리를 발견할 수 있는 소리이기도 한 것처럼요. 나는 어디 있지? 나는 어디에 있지? 당신은 로즈예요, 엄마. 엄마는 일어나셨어요.

 

그리고 또 다른 발견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웹사이트 업데이트를 준비하면서 헤드레터들을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바타이유의 <도큐망 documents>을 차용하면서, 로쿠스 솔루스의 초현실적 얽히고 설킨 그러나 절대 관련 없는 것이 아닌 것들을 이어나가는 프로젝트들을 ‘도큐망’이라고 부르기로 했거든요. 근데 바로 그 <도큐망>이 바타이유의 ‘반 건축이론’과 연결됩니다. 좀 더 공부하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바타이유의 ‘비정형 informe’ 개념에 대한 오마주를 한 책이 이브 알랭 부아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집필한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입니다. 이 또한 도서 목록에 추가하려고 합니다. 두 학자가 집필한 글들이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으로 이어져 있고, 연결되는 개념들끼리 다시 연쇄적으로 찾아서 이어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책이기도 해요.

 

교부신청을 하는 와중에 잠깐이나마 이런 흥분의 순간들이 두근거렸습니다.

 

아, 그리고 또 있어요.

 

몇 해 전에 읽었던 『도서관 환상들』을 다시 읽으며, 우리가 만들어 나갈 <가상의 도서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봤습니다.
특히 도서관이라는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우울 melancholy’이라는 심리적 기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도서관은 세속과 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한 호젓함과 세계를 향한 개방성을 동시에 지니는데, 두 가지 특성이 대치하며 이루는 긴장 상태는 그 자체로 도서관이 피난처이자 제의적인 장소라는 데 대한 우울한 찬미이다” (p.131)

 

그리고 서점의 사서인 강영희 큐레이터의 전시 기획 방식을 ‘백과사전식’ 사유의 도서관에 가깝다고 잠정적으로 놓고 생각해본다면, 디드로가 추구했던 백과사전과 같은 야망(?)보다는 그 만의 ‘지식의 연쇄고리 enchainement de connaissance’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디드로의 『백과사전』을 주문해서 오늘 받았습니다.

 

쌓인 도서 사이로 그의 책을 끼어 넣으려고 보니, 영희씨가 며칠 전에 놓고 가신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출판한 ‘도서출판 b’에서 이 책을 출판했더군요.

 

그리고 더 멋진 우연은 김혜순 시인의 “수레바퀴”와 디드로의 “연쇄고리”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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